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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흥왕 즉위 시절에 왕권은 그다지 강하지가 않았다. 당시 국가 중대사는 귀족들로 구성된 6부제를 통해 그 방향이 결정되었고 왕은 그 권력의 대표 혹은 일원정도의 위치에 있었다. 당시의 수도가 6개로 나뉘어 자치되고 있었다는 사료와 각 부의 장들이 사병부대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료를 통해 유추할 수 있다. 또 각 귀족들은 천신사상(사람은 하늘의 자손이라는 신앙)을 신봉하고 있었기에 왕권은 더욱 약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의 국제 정세는 중국 백제 그리고 일본을 중심으로 해서 불교를 통한 동아시아 질서의 축이 존재하고 있었다. 외적으로는 그러한 정세에 참여하려함과 내적으로는 중앙집권화를 노리는 법흥왕은 중국 북조의 불교사상(왕은 곧 부처)을 수용하려했고, 그 과정에서 귀족들의 반발에 직면하자충신이었던 이차돈의 순교 충언을 받아들여 그에게 참수형을 내렸다는 것이다. 즉, 이차돈의 순교는 알려진 내용과는 다르게 이차돈 자신의 제안이었고, 왕은 정치적인 수단으로 그러한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그 제안이라는 것이, 이차돈이 거짓으로 왕명을 꾸며 귀족들의 성지에 사찰을 짓고, 귀족들이 사찰을 짓게 한 왕에게 반발을 하면 왕은 …
법흥왕 즉위 시절에 왕권은 그다지 강하지가 않았다. 당시 국가 중대사는 귀족들로 구성된 6부제를 통해 그 방향이 결정되었고 왕은 그 권력의 대표 혹은 일원정도의 위치에 있었다. 당시의 수도가 6개로 나뉘어 자치되고 있었다는 사료와 각 부의 장들이 사병부대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료를 통해 유추할 수 있다. 또 각 귀족들은 천신사상(사람은 하늘의 자손이라는 신앙)을 신봉하고 있었기에 왕권은 더욱 약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의 국제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