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덧붙여, 약간의 시선이동을 통해 이 영화에서 시간에 대한 담론을 얻는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
‘ 영화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처와 치유는 곧 기억과 망각에 다름 아니고 영화는 끊임없이 기억과 소멸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
상우의 절제와 정제를 통해 사랑에 대한 슬픈 시선을 끊임없이 경박스럽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변화를 무덤덤하게 바라보는 관조의 시선만이 존재하고 있다.
상투적인 장면의 복선연결을 통한 끊임없는 기억과 소멸이 아니라 눈에 띄지 않는 곳곳, 예를들어 버스 정류장에서 헤어지는 두 남녀의 모습과 한복을 입고 할머니의 정지화면이 겹치면서 죽음과 이별이라는 묻혀있는 의미의 파편들을 넌지시 제시해주는 부분들을 통하여, 이런 단편적 이미지들이 영화의 끝으로 치달아 갈수록 관객은 어떤 구도에 대응하는 감정의 부피가 마음속에 괴게 되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런 감정의 부피는 피날레에서 상우의 뒤돌아서는 구도속에 단단히 수용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아무 풀이가 필요없는 글자 그대로의 합리화 혹은 자기긍정이다. 자신이 상대방에서 잊혀지는 것보다 더 씁쓸한 것은 나 자신이 누군가를 잊어버린다는 것. 세상을 살아가며 겪는 변화에 대한 가장 확실한 부수적 현상을 허진호는 상우를 통해 드러낸 것이다. 다시 채집할 수 없는 상우의 직업과도 맞물리며 영화는 한층 더 넓어진 허진호의 시선을 대변해 주는 소도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그리고 그 기나긴 여정의 끝은 한세트의 마이크를 든 채 자연의 소리를 녹음하는 유지태의 마지막 미소로서 그 흐름에 자신을 내맡길 준비가 된 자의 차분함을 여과없이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