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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8월 22일 ‘한일합병늑약’이 체결되었다. 결국 대한제국은 오나전히 망하고 한반도는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을 하게 된 것이다. 이 같은 민족의 절대절명의 위기 속에서 고민하던 범정은 1911년 2월 보성전문학교를 자퇴하고 친족에게 연락도 하지 않고 만주 망명을 결행하였다. 35년간의 지난한 고행이 시작된 것이다. 범정이 발을 내딛은 곳은 북간도였다. 우리 근대사에서 간도는 망국의 설움과 재기의 희망이 묻혀져있고, 독립 항쟁의 선혈이 뿌려진 역사적 현장이다. 당시 간도 지역에서 활발히 항일 운동을 전개한 단체들은 천도교에서 갈라져나온 대종교 계통의 단체들이었다. 범정 역시 사상적 맥락이 잇닿은 만큼 길림성에서 활동하던 대종교 계통의 ‘남선북마독립군’에 자연스럽게 합류하였다. 범정은 일단 군자금을 조달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범정은 군자금 조달에 있어서 상당한 잠재력을 갖고 있었다. 우선 그의 고향이 북간도에 인접한 평북 용천이었기 때문에 국내에 잠입하고 탈출하기가 용이했다. 또한 가세도 넉넉한 편이어서 개인적으로 자금을 조달할 수도 있었고, 보성전문 시절 사숙한 선생님들과 붗니??친분이 있었던 명망가들에 대한 접근도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조달된 자금은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 중 한분이었던 이갑성,이규갑과 김구등게 전해졌다. 이 같은 과정에서 쌓은 경험과 우의는 해방 이후 범정이 육영 사업을 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일제의 압력으로 항일 독립 전선은 나날이 약해져만 갔다. 결국 범정은 망명 6년만인 28세의 나이에 고향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범정은 자신의 신념에 따라 독립운동을 계속 하였고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다. 그러던중 갑자기 해방이 되었다. 1945년 9월 중순에 범정은 꿈에 그리던 고향 용천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소련군이 진주한 북한 지역은 공산주의자의 세상이 되었다. 1946년 1월 26일, 범정일가는 월남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