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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한일관계
사실 구석기시대만 해도 한반도와 일본 열도는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다. 지금부터 약 1만년전 빙하기가 끝나고 마침내 일본이 섬으로 되면서 두 지역은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 한반도와 일본 두 지역에서는 빗살무늬토기문화[櫛文土器文化]와 죠몽토기문화[繩文土器文化]라고 하는 각기 다른 신석기 문화가 형성되었다. 그런데 부산 동삼동 조개더미[貝塚]에서 큐슈지방에서 만들어진 죠몽토기가 발견되고, 쓰시마의 코시다카[越高] 유적과 큐슈 서북 연안에서 한반도의 덧무늬토기[隆起文土器]가 출토되는 등 이 무렵에도 이미 `바다의 길`은 열려져 있었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의 교류는 야요이시대[彌生時代: BC 3C- AD 3C]에 들어 한층 활발해졌다. 금속기의 사용과 농경의 시작을 특징으로 하는 야요이문화는 사냥·고기잡이·채집을 주로 하는 경제생활상태에 있었던 죠몽문화와는 그 질을 달리 하는 문화였다. 그런데 일본의 이같은 선진적인 문화는 다름아닌 한반도에서 건너간 주민들 곧 도래인(渡來人)들에 의해 전파된 것이었다. 반달돌칼[半月形石刀]은 물론 한반도에서만 보이는
홈자귀[有溝石斧]와 돌검[磨製石劍] 등의 간석기[磨製石器], 한반도에서 발견된 것과 같은 단립형(短粒型) 자포니카종의 쌀낟알[古代米], 그리고 바둑판 모양의 고인돌[支石墓] 등 야요이 전기(BC 3C- BC 2C)의 유물 유적은 쌀을 주식으로 하는 일본문화의 기반이 한반도로부터의 주민들의 집단 도래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후 야요이 중기(BC 1C- AD 1C)에 이르러 북큐슈[北九州] 일대에는 놋단검[銅劍]과 놋투겁창, 잔무늬거울[細文鏡] 등의 청동기와 민무늬토기[無文土器], 독무덤[甕棺墓] 등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문화가 또 한차례 밀려 들어왔다. 여…
부`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일제의 한국강점은 하등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며, 외세의 지배는 한국역사 전
체를 일관하는 하나의 특징으로 한국인 역시 이러한 외세의 지배에 체질적으로 익숙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역사를 고조선이 아닌 한사군부터로 보는 것도 문제지만, 당시 반세기 이상 앞선 문화를 가지고 있던 가야가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는 것은 더더욱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다. 더우기 왜(倭)가 국호를 `일본(日本)`으로 정한 것은 670년경이다. 7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등장하는 `일본`이라는 이름이 4세기 후반에 `임나일본부`라고 하여 버젓이 나타나고 있는 현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근래에는 일본 학계에서도 야마토 정권으로 대표되는 일본 고대국가의 성립 시기를 4세기 후반에서 6세기 후반으로 낮추어 잡는 견해가 일반화되고 있다. 4세기 후반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를 침략하여 가야지방을 지배했다는 종래의 통설을 스스로 부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특히 이와 관련하여서는 진무천황[神武天皇]이 휴가[日向]의 미야자키현[宮崎縣]을 출발하여 큐슈와 츄코쿠[中國]·시코쿠[四國] 지방을 제압한 다음 오사카[大阪]와 나라[奈良] 지방에 진출하여 일본의 첫 천황이 되었다는, 일본측 기록에 나오는 진무동정설화[神武東征說話]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즉 한국 학계 일각에서 주장하듯이 그것은 북큐슈에 자리잡았던 가야계통 소국(小國)의 지배층이 백제계통 소국의 지배층과 함께 5세기말-6세기초에 동쪽 야마토[大和] 지방 정복에 성공하고 천황가의 왕권을 형성한 사실을 반영한다고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