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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8(의종220 ∼ 1241(고종28). 고려의 문신. 재상. 본관은 황려. 호는 백운거사(백운). 만년에는 시.거문고.술을 좋아하여 삼혹선생이라고 불렀다 한다.
호부시랑을 지낸 윤수의 아들이다. 9세때부터 중국의 고전들을 두루 읽기 시작하였고 문체가 뛰어남을 보였다. 14세때 사학의 하나인 성명재의 하과(여름철에 절을 빌려 과거준비를 위한 공부)에서 시를 빨리지어 선배 문사로부터 기재라 불렸으며 장래가 촉망되었다. 이때 그의 희망은 장차 문학직을 맡아 문명을 날려 크게 입신출세 하는 것이었다.
지엽적 형식주위에 젖은 과시의 글(과거지문)같은 것은 하찮은 소인배들이 배우는 일로서 멸시하였고, 그가 사마시에 연속 낙방한 큰 요인의 하나는 이러한 데에 있었다. 16세부터 4∼5년간 자유분방하게 지냈으며 기성문인들인 강좌칠현과 기맥이 상통하여 그 사회에 출입하였다. 이들 가운데서 오세재를 가장 존경하여 그 인간성에 깊은 공감과 동종을 느끼곤 하였다. 1189년(명종19) 유공권이 좌수가 되어 실시한 사마시에 네 번째 응시하여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이듬해 임유가 지공거. 이지명이 동지공거가 되어 실시한 예부시에서 동진사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곧 관직에 나가지는 못하게 되자 25세 되던해 개경의 천마산에 들어가 시문을 지으며 세상을 관조하며 지냈다. 장자의 무하유지향(세상의 번거로움이 없는 허무지연의 악사)의 경지를 동경하기도 하였다. 백운거사라는 호는 이 시기에 지은 것이 라고 한다. 26세(1193)에 개경에 돌아와 지난 시절과는 달리 빈궁에 쪼들리게 되었고, 수년래의 무관자의 처지를 한탄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왕정에서의 부패와 무능, 관리들의 방탕함과 관기의 문란, 사회상의 피폐, 그리고 10여년래의 남부지방의 농민 폭동 등은 그의 사회.국가의식을 크게 촉발하였으며, 이때에 (동명왕편).(개원천보영사시) 등…
한편으로 왕정에서의 부패와 무능, 관리들의 방탕함과 관기의 문란, 사회상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