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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부의 사법기관은 일반행정관서와 같이 중앙행정부서의 일부로 총독에게 직속되어 있었다. 따라서 사법기구의 구성, 법관의 인사들이 총독의 재량에 맡겨져 법관의 신분이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 있었다. 즉 사법기관은 총독정치의 보조기관에 불과했고, 한국의 사법권 및 감옥사무는 이미 1909년 7월 위탁형식으로 일제 박탈되어 통감부사법청에서 관장한 바 있었다. 이때 이미 그들 손으로 만들어진 한국 재판소의 3심4급제를 계승하여 고등법원, 공소원, 지방재판소, 구재판소를 구성하고 검사국을 부설하였다. 여기에 일본이 판검사와 서기가 배치되어 한국에 있어서의 민사형사재판 및 비송사건까지 장악하였다. 재판제도는 일제가 한민족을 합리적으로 탄압하기 위한 절차였으므로 일본인 법관이 일본법 내지 총독부 법령에 의하여 한민족에게 일방적으로 중형을 내렸다. 법관은 이미 1909년 일본인에게 독점되어 일본인 판사 192명에 대해 한국인 판사는 88명이었으나 병탄 후 그나마 일본인으로 대치되어 1912년에는 판사 199명 중 38명과 검사 57명 중 3명만이 한국인이었다(법무부, 302). 또한 같은 법관이라도 민족차별이 심하여 한국인 판사는 일본인이 관련된 재판을 담당할 수 없었으며 재판장이 될 수도 없었다. 차별폐지를 선언한 1920년 이후에도 이심법원을 비롯한 합의부 재판부 구성에 있어 한국인이 재판장이 된 일은 없었으며, 일본이 재판자의 절대적인 권한을 갖고 있어 사실상 한국인 판사의 재판권은 박탈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