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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쉰들러 리스트>와 <피아니스트>가 다른 점은 이 영화에는 감동적인 연설도, 가슴을 적시는 희생담도 없이 오로지 살아야겠다는 욕구만이 그려진다는 것이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의 유태인 강제 거주 지역인 게토를 떠돌며 숨어살았던 피아니스트 스필만의 삶에서 영화는 인간성이 말살된 상황에서도 끝까지 남아있는 삶에 대한 욕구를 무정하리 만치 집요하게 바라본다. 피아노 연주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던 촉망받는 예술가가 자존심과 명예를 잃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설설 기어다니며 먹을 것을 갈망하는 상황은 슬프고 엄숙하다. 살고 싶다는 욕망이 얼마나 처절하며 숭고한 것인지는 별다른 정서적 과장 없이도 전하는 것이다.
스필만에게 예술은 중요한 것이었지만 그의 예술은 다른 사람을 구제해주지 못한 대신 단 한 사람, 자신의 목숨을 구제하는데 쓰여졌다. 이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인 이 장면, 도피 생활 말기에 독일군 장교에게 발각된 그는 직업이 뭐냐는 장교의 질문에 우물거리면서 피아니스트라고 대답한다. 장교의 채근에 밀려 피아노 건반을 잡은 스필만이 연주를 시작하자 그 독일군 장교는 감동을 받는다. 멀리서 도시를 폭격하는 전쟁터의 소음이 들리는 가운데 이루어진 이 기이한 연주, 연주자와 청중이 한 명뿐인 이 연주회는 잔인한 느낌을 준다. 스필만이 독일군 장교에게 준 감동의 정체는 무엇일까? 사람을 숱하게 죽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자의 심금을 울리는 피아노 연주는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가? 마침내 살아남은 스필만이 전쟁이 끝나고 소원대로 바르샤바의 방송국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마지막 장면에서 감정이 고양되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