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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학문적 연원은 주로 성호의 학파였다. 당시 학문의 정예부대인 남인 일부는 모두 성호의 학도들이었다. 그는 16세기에 성호의 유고를 읽고 비로소 얻어보고 느낀 바가 있는데 그의 자기 묘지명 중에서 그 경위는 아버지가 출사하여 경성에 가게 되어 같이 유경하게 되었고 이승훈이 성호선생의 학을 저술하므로 그도 역시 성호선생의 유집을 얻어 읽고 은연히 학문을 전공하게 되었다 한다.
다산은 또 정치 경제를 가장 잘 아는 사람으로 반계를 숭배한 동시에 그의 개혁론을 율곡의 개선안과는 달리 근본적인 개혁안으로 평가하였고 강진 유배 이전인 34세에 지은 [고시 24수] 중 반계를 추앙한 것을 보면 다산의 학풍은 바녜 유형원의 영향을 적지 않이 받았음을 알 수 있다.
癸卯년, 22세 때에 經義進士가 되어 정조와 첫 만남을 가졌고, 그 후로 17년간 정조의 총애는 지극하였으나 정조의 승하와 때를 같이하여 옥사를 치루었다. 이에 다산 정약용은 정조, 소조가 교체된 순조 2년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40세에 강진으로 유배되었고, 그 곳에서 다산은 많은 책을 서술하였다.
3. 다산의 정치사상
다산의 정치사상은 다산의 독창적인 사상이었다기 보다는 …
참고문헌
• 『목민심서』 권4, 吏典 제 1조 束吏.
• 유동원, 1983, 『한국실학개론』, 정음 문화사,
• 최익한, 1989, 『한국실학개론』, 청년사,
• 최익한, 1989, 『실학파와 정약용』, 청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