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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종희는 부득이 칼과 창을 놓고 붓대를 집어 무기로 삼아 학술 연구에 파묻혀 민족 부흥의 선전을 진행하고 희망을 장래에 기탁했다. 강희 17년 청 조정은 조책으로 박학홍사과(박학홍사과)를 열어 해내(해내)의 명유(명유)를 불러 등용했다. 이는 정식 과거고시 외에 황제가 명사·학자들을 위해 특별히 설치한 고시이며, 아울러 파격적으로 우대하여 관(관)에서 자금을 보내고 선비와 서민을 농락하여 청의 통치에 대한 잠재 위협을 감소시켰다.
당시 한림원학사(한림원학사) 섭방애(엽방애)가 황종희를 추천했는데 그는 거절하고 청조의관리가 되지 않았다. 그는 영파(영파)에서 서원(서원)을 창설하고 스승 유종주가 강학(강학)하던 증인서원(증인서원)의 이름을 붙여, 용상(용상) 증인서원으로 불렸는데 따르는 자가 수백 인이었다. 그는 부지런히 저술을 하여 나이 80세를 넘어서도 아직 그치지 않았는데, 저작이 아주 풍부하여 대략 60여 종이 있었다. 그가 사망할 때 관곽을 갖추지 말도록 유언으로 명했으니, 대개 자신이 국난을 만나 자기 신체가 속히 썩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는 민족 기절이 풍부한 역사가이자 사상가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학문은 양명학(양명학)이 중심이지만 황존소·유종주 등의 영향을 받아 동림학파의 실학주의도 물려 받았다. 또한 경(경)·사(사)의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고염무(고염무) 고염무(1613~1682) 중국 명나라 말 청나라 초기의 학자, 사상가. 명나라 말기에 성하던 양명학이 헛된 이론에 치우친다 하여 멀리하고, 실증과 실용을 중히 여기는 신학풍을 일으켰다. 고증학 정통파의 창시자로 불리고 있다.
참고문헌
☞ 서울대학교 동양사학연구실 저, 『강좌중국사 Ⅳ』, 지식산업사, 1989
☞ 고국항 저, 오상훈 외 2명 역, 『중국사학사 하』, 풀빛, 1998
☞ 패총무수 외 저, 윤혜영 역, 『중국사』, 홍성사,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