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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최제우의 가계와의 비교
교조 최제우와 최시형의 세계를 비교해 보면, 최제우의 7대조 최진입(1568~1636)은 임진왜란 때 종군했다가 난중에 무과에 급제하여 정유재란에 공을 세우고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이르렀다. 그 후 병자호란 때 전사하여 사후에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정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용산 서원에 배향되었는데, 그의 사적을 담은 정무공실기가 남아 있다.
최진립 이후 최제우의 선조 중에는 아무도 벼슬길에 나아간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부친에 이르기까지 계속 몰락의 길을 걸었다. 최제우의 부친 최옥은 벼슬은 얻지 못했지만 영남 일대에 문명이 있던 학자였다. 그의 문집이 남아 있는 점과 최옥의 이름으로 편찬한 영남유생들의 문집이 다수 발견되는 점에서 볼 때 학자로서 최옥의 명성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한편 최옥의 8촌이 되는 최림(1779~1841)도 역시 외와집이라는 문집을 남기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최제우의 집안의 비록 벼슬길이 끊어져 몰락은 했을 지라도 당시 조선사회를 지배하던 성리학에 대한 상당한 기반을 가진 가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최제우는 비록 재가녀의 자식이었지만 부친으로부터 상당한 수준의 학문을 익힐 수 있었다.
이에 대해 최시형의 집안은 비록 그 세계는 어느 정도 확인이 되지만 최제우의 세계에 비해 훨씬 미천한 신분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 어떤 자료에도 최시형의 선조들이 벼슬을 했거나 학문을 닦아 문집을 남겼다는 기록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최시형은 어린 시절 학문을 닦을 여유나 처지가 되지 못하였다. 집안이 가난하기도 했거니와 양친마저 일찍 여의고 머슴살이로 생계를 꾸려가야 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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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희, 한국근대사상과 민족운동 혜안, 1996.3
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원
박맹수, ‘최시형 연구: 주요활동과 사상을 중심으로’ 한국학대학원 1995.
여주군, ‘여주의 역사와 문화유적 자료집’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