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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시련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보다 30여년전 고구려는 선비족이 세운 전연(前燕)의 공격을 받아, 수도인 환도성이 함락되는 참패를 당했다. 아버지인 고국원왕은 홀로 말을 타고 달아나 겨우 목숨만 건졌다. 고국원왕은 선왕인 미천왕의 무덤이 파헤쳐져 시신이 끌려갈 뿐 아니라, 왕모(王母)와 왕비를 포함한 5만 명이 포로로 잡혀가는 치욕을 지켜봐야 했다.
고국원왕은 전연에 대해 굴욕적인 외교를 할 수밖에 없었다. 미천왕의 시신은 다음 해에 돌려 받았으나 왕의 어머니는 13년 후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 왕실의 권위가 추락하고 국력이 약화된 틈을 타 백제는 북진을 감행했다. 이런 난국에 고국원이 어이없게 죽고 말았으니, 천손(天孫)을 자부하던 고구려왕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국가는 일대 위기를 맞았던 것이다.
소수림왕은 이런 위기를 기회로 활용할 줄 아는 탁월한 리더십을 지닌 군주였다. 그가 보여준 행적과 정책은 소수림왕이 복수심조차 조절할 만큼 감정을 절제한, 뛰어난 지도자였음을 확인시켜준다. ‘삼국사기’는 그가 “몸이 장대하고 웅략(뛰어나고 큰 계략)을 가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소수림왕이 펼친 개혁 정책에는 그의 인물 됨됨이가 잘 나타나있다.
소수림왕은 먼저 급선무인 외적의 침략을 막기 위해, 중국 북조의 새로운 강국인 전진(前秦)과의 외교 교섭을 서둘렀다. 즉위 다음해인 372년 전진에서 보내온 승려와 불상 등을 받아들이고, 사신을 파견하여 외교관계를 맺었다. 이를 통해 중국쪽의 침략을 막고, 강대국으로부터 국제적으로 지위를 인정받음으로써 추락한 왕실의 권위를 높일 수 있었다.
아울러 그는 내정 개혁에 착수했다. 중국의 문물 제도를 수용한 개혁이었다. 소수림왕의 개혁에는 귀화한 중국계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다. 고국원왕 대에 이미 중국에서 투항해온 동수(冬壽) 등이 정치와 외교 분야에서 활약했던 터였다. 소수림왕의 개혁정책은 고구려의 백년대계를 다진 정치·사회·문화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