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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3세의 생존 중에 로마교황청은 그 개혁의 저의를 숨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림자 같은 실력자인 힐데브란트의 보좌를 받은 역대 교황은 착착 준비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1056년 하인리히 3세가 죽자 뒤를 이은 하인리히 4세는 아직 어린애였다. 교황청은 돌연 그 저의를 드러냈다. 1059년 교황 니콜라우스 2세는 추기경회의에 의한 교황선거규정을 공포하였다. 추기경은 그리스도교회의 [요체], 즉 로마교회의 가까이 있는 사람이란 의미로 교황을 보좌하는 고위성직자를 가리킨다. 이는 명백히 교황선거에 대한 세속 권력, 구체적으로는 황제의 간섭을 배제코자 하는 것이었다. 또한 1073년 스스로 교황자리에 오른 힐데브란트, 즉 그레고리우스 7세가 1075년 초 교서(교황의 명령서)를 발표하여 세속인에 의한 성직자 서임을 금지했을 때 교황청의 개혁운동이 갖는 진정한 의도가 분명해졌다. 그것은 확실히 <교회의 자유>, 모든 세속적 권력으로부터의 무조건적인 독립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이미 이것은 클뤼니주의의 한계를 넘어선 황제신정정치의 이념 자체에 대한 도전이었다. 더구나 이것은 독일국왕의 왕국통치원리를 무너뜨리고자 하는 것이었다. 국내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