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글쓴이 안네마리 피퍼는 선과 악의 뿌리를 더듬으려 방대한 학문의 영역을 오고간다. 때문에 이 책을 읽다보면 서구문화의 뿌리 깊은 인식론이 모두 선과 악에 관한 오랜 논쟁으로 일관한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게도 된다. 신학, 인류학, 심리학, 철학, 사회학, 자연과학까지 선과 악에 대해 말하지 않는 학문은 없다. 그럼에도 그것들이 선과 악에 대해 내리는 결론은 의외로 간단하고도 싱겁다. 요컨대 ‘이 문제는 간결하고 명료한 답을 얻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므로 선과 악의 정체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있다’(186쪽)는 것이다. 이건 이 책의 말미에서 글쓴이가 잠정적으로 내리는 결론이지만, 어쩌면 악에 관한 한 인류가 내릴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인지도 모른다. 악은 규명되어지지 않고 단지, 존재하는 것이다. 선의 얼굴을 한 도덕의 또 다른 얼굴의 한 이면으로.
그러므로 이 책을 악의 본질을 미리 규명해 그 뿌리를 잘라내겠다는 식의 ‘선의’로 읽었다가는 경악할지도 모른다. 글쓴이는 악을 말하면서 최대한 (필연적인!) 관용(?)을 베푼다. 악을 무조건 배척해야한다거나 악의 실체를 낱낱이 파헤쳐 경각심을 일으키겠다는 의도는 애초부터 없었던 듯하다.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칸트, 프로이트, 마르쿠제, 키에르케고르 등을 포괄적으로 아우르면서 악의 실체에 정밀하게 접근하지만, 가장 설득력이 강한 부분은 이미 〈머리말〉에서 다 표명했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