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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백겸의 관직생활
1585년(선조 18), 그가 34세 되던 해에 교정청(교정청) 교정낭(교정낭)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586년 중부참봉에 임명되어 관직생활을 시작하였으나, 1589년(선조 22) 전주 경기전참봉으로 재직 중, 기축옥사(기축옥사) 때 정여립(정여립)의 생질인 이진길(이진길)의 시체를 거두어주었다는 죄로 함경도에 유배되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선조 25) 사면되어 돌아오는 길에 왜군과 내통한 주모자를 죽인 공으로 내자시직장에 특별 임명되었다. 함경도 유배생활이 한백겸의 개인적 좌절이요 시련이었다 하면, 왜란은 국가와 민족의 시련이요 비극으로서, 그의 인생관은 물론 국가관 내지 민족의식에 적지 않은 변화를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1593년(선조 26) 한성부참군으로 난민에게 죽을 끓여주는 임무를 수행하면서 아사자가 속출하는 전란의 참상을 목도하였을 것이다. 이로써 그는 침략자를 증오하고 무기력한 왕조당국을 비판하게 되었을 것이다. 한편, 한 관료 내지 지식인으로서 부국강병의 중요성을 절감하며, 실학 선구로서의 현실대응방안-즉 토지제도와 수취체제의 개편-을 통해 국가경제를 재건하겠다는 발상…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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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회 한국고전연구 심포지움 - 『동국지리지(동국지리지)』의 종합적 검토 - : 한백겸의 학문과 『동국지리지(동국지리지)』저술동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