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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3상회의 결정 이후 격렬한 신탁논쟁을 중심으로 타협의 여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정치세력은 김규식, 원세훈을 중심으로 한 `민주의원`과 여운형과 허현을 중심으로 한 `민주주의민족전선`으로 양극화되는데, 이를 극복하고자 한 움직임이 `좌우합작운동`이다.
좌우합작운동은 크게 2단계로 구분된다.
제 1단계는 1946년 5월부터 10월로 이때는 하지의 합작지지성명을 계기로 좌우합작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그럼 미국이 왜 좌우합작운동을 지지했을까? 이는 통일적 임시정부가 공산주의자들의 주도에 의하여 수립되는 것을 막자는 데 있었다. 좌우합작은 자기 영향하의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미국의 기본전략이었다) 좌우합작운동이 진전되어 가는 가운데 하지는 입법기관설치안을 발표하고, 1946년 7월25일에 좌익측이 합작원칙 5개항을, 그후에 우익측이 합작 8원칙을 발표한다. 그러나 이 시기에 좌우합작운동은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한다. 그 주요 원인은 공산당 간부의 체포령과 좌익 내부의 3당합당 문제때문이었다.
제 2단계는 1946년 10월부터 1947년 12월까지로 설정할 수 있다. 이 때는 제2차 미소공위가 결렬되자 한민당이 주축이 되어 합작위원회에 대한 비난성명서가 제출되고 합작위원회에 대한 비난이 격렬했던 시기다. 미국은 이미 대소강경정책인 트루만독트린을 발표한 이후였기 때문에 2차 미소공위의 활동 및 결과에 대해 큰 기대를 갖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단지 미국이 재개 협상에 응한 것은 한국문제의 단독처리에 앞서 확고한 명분을 세우기 위한 조치로써 파악될 수 있다. 제 2차 미소공위의 실패는 이를 통한 `통일민주주의 임시정부수립`이라는 1차적 목적을 지녔던 좌우합작운동의 의미를 상실케 하였다. 또한 여운형의 피살은 좌우합작운동의 지속을 어렵게 만든 요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