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자연이나 자연 현상은 일반적으로 우주의 힘, 미, 위대함이나 혹은 인간의 ‘자연적인’ 성질, 문명의 발달 과정 속에서 상실되는 인간 본래의 순수함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황순원의 ‘소나기’(사실 미천한 독서량으로 인해 예로 들 수 있는 작품이 당장 떠오르지 않는다.)에서는 소나기 자체가 암시, 복선적인 성격을 띤다. 그러나 오스뜨롭스끼의 ‘뇌우’는 그러한 일반적 상징을 벗어나 있다.
우선 뇌우는 자연 현상 그 자체로서의 의미만 지닐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 속에서는 거의 배제된 것으로 볼 수 잇다. 오스뜨롭스끼가 제목을 뇌우로 정한 것과 각 장면에서 뇌우가 나타나는 시점을 우연적인 것으로 보기에는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각 인물들의 인식에서 뇌우가 차지하는 비중과 의미가 다르다. 지꼬이, 까바노바가 대표하는 구세대는 뇌우가 <죄를 깨닫도록 벌로 내려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신세대를 대표하는 바르바라는 자연 현상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며 과학적인 지식을 지닌 꿀리긴은 뇌우라는 자연 현상을 인간의 기술로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 까쩨리나는 뇌우가 그녀의 죄를 단죄하려는 계시로 인식하면서 죄의식을 느낀다.
이러한 뇌우는 까쩨리나의 행동이 한 전환을 할 때마다 발생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녀의 의식속에 이미 규정된 뇌우의 의미가 바탕이 된 상태에서 그녀가 의미부여를 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녀가 바르바라에게 처음으로 고백할 때, 남편이 돌아온 후 고통스러워하다 결국 실토했을 때와 같은 상황의 변화에서만 오스뜨롭스끼가 뇌우를 극 중에서 배치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으로 본다. 즉 뇌우에는 일종의 역할이 부여된 것이다.
그렇다면 까쩨리나가 관습에 반하는 죄를 짓고 고통스러워하다가 결국 자살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뇌우는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