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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의 미에 대해서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예찬을 거듭해 왔다. 그 선의 유려함과 하염없음-이는 건축에 있어서 현수곡선(懸垂曲線)과 같은 대자연의 곡선이기도 하다-을 얘기하고, 은은하면서도 화려한 색감을 극찬하기도 한다. 또 몸을 드러내거나 속박하는 옷이 아닌, 감싸 안은 포용의 미학을 얘기하며, 이 모든 것들을 아울러 `조화의 극치`라는 말로 칭송하기도 한다.
우리의 복식사를 통해 가장 안타까운 것은 가야를 병합하고, 당(唐)과 연합군을 형성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가 당의 복식 문화에 감화(感化)되어 그 때까지 전해 온 우리 민족 고유의 복식을 버리고 당의 복식을 취함에 따라 우리 복식의 전통이 단절되고 말았다는 점이다.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은 그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신라 초기의 의복 제도는 그 모양을 고증할 수 없다. 제 23대 법흥왕 때에 이르러 비로소 육부인(六部人)의 복색과 존비(尊卑)의 제도를 정하였으나 이것은 이속(夷俗:오랑캐의 풍속)과 같았고, 제 28대 진덕왕 재위 2년에 이르러 김춘추가 당나라에 들어가 당의 의식을 따를 것을 정하자 당나라 태종이 이를 허락하고 겸하여 의대(衣帶)를 하사하였으므로 드디어 환국하여 시행함으로써 이속(夷俗)을 화속(華俗:당, 즉 중국의 풍속)으로 바뀌게 되었다.
문무왕 재위 4년에 부인(婦人)의 복제를 개혁하였는데, 이로부터의 관제도가 중국과 같았다.
우리 태조(太祖:왕건)께서는 천명을 받아 무릇 국가의 법도를 세움에 신라의 옛 제도를 많이 본받았던지라, 지금에 이르러서도 조정의 사녀(士女)들의 의상은 대개 김춘추가 당에서 청하여 온 유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