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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담은 성종 20년(서기 1489년)에 송도 화정리에서 출생하였다. 이름은 경덕이고 자는 가구이며 화담이라는 호 외에 복재라고도 하였다. 18세에 대학의 치지재격물조를 읽다가 깨달은 바가 있어 `학문을 하는데 격물을 먼저 하지 않으면 독서는 하여서 무엇을 하겠는가?` 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중요한 학문적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천지 만물의 이름을 적어 벽에 붙여놓고 매일 그 이치를 궁리하여 탐구하였고 사색과 궁리를 하여 얻은 것을 다시 독서를 통하여 확실하게 하였다.
그는 `나는 스승을 얻지 못하여 노력을 많이 하였다. 후인들이 나의 말을 따르면 나같이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리라.` 고 하였다. 이를 통하여 보면 그의 학문은 독학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그는 모친의 명을 따라 진사시를 보아 합격을 하였으나 곧 과거공부를 포기하고 개성 화담에 살며 학문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중종 말년(1544년)에 후릉참봉으로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으며 이어 병에 걸렸는데 그는 `성현의 말씀은 이미 선유들이 주석을 하였으므로 거듭 말할 바가 없지만 아직 미진한 부분은 기록하여 전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 라 하고 [원이기], [이기설], [태허설], [귀신사생설] 등의 여러 편을 저술하였다.
명종 원년(1546년) 58세로 돌아갔는데 임종에 제자가 `선생님 오늘의 의사가 어떠하십니까? 라고 물으니 그는 사생의 이치를 안 지가 이미 오래라 나의 의사가 편하다.` 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화담은 평소 궁리진성과 사색체험을 주로 하였으므로 문자로 발표하기를 좋아하지 않아 저술이 적었다. 위의 수편의 글도 지극히 간단하여 설명이 미진하나 이를 통하여 그의 철학과 사상을 엿볼 수가 있다. 화담은 송의 소강절과 장횡거를 사숙하여 그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기수의 학은 강절을 다르고 이기설은 횡거를 따랐는데 독창적인 이론도 많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