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나는 쉴새 없이 손으로 이마의 땀을 씻어 가며 그의 뒤를 따랐으나 한참씩 가다 보면 어느덧 그를 어둠 속에 잃어 버리곤 했다. 나는 몇 번이나 나뭇가지에 얼굴이 긁히우고, 돌에 채여 무릎을 깨우고 하며 “대사…” “대사…” 그를 불러야만 했다. 그럴 때마다 경암은 혼잣말로 낮게 중얼거리며 나를 기다려 주는 것이나, 내가 가까이 가면 또 아무 말도 없이 그냥 휙 돌아서서 걸음을 옮겨 놓기 시작하는 것이다.
밤중도 훨씬 넘어 조각달이 수풀 사이로 비쳐 들면서 나는 비로소 생기를 얻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경암이 제 아무리 앞에서 달린다 하더라도 두 번 다시 그를 놓치지는 않으리라 맘속으로 다짐했다.
이렇게 정세가 바뀌어졌음을 그도 느끼는지 내가 그의 곁으로 다가서자 그는 나를 흘낏 돌아다보더니, 한 쪽 팔을 들어 먼데를 가리키며 반원을 그어 보이고는 이백 리라고 했다. 이렇게 지름길을 가지 않고 좋은 길로 돌아가면 이백 리 길이라는 뜻인 듯했다.
나는 한 마디 얻어들은 중국말로 “쎄 쎄”하고 장단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했다.
우리가 정원사 산문 앞에 닿았을 때는 이튿날 늦은 아침녘이었다. 경암은 푸른 수풀 속에 거뭇거뭇 보이는 높은 기와집들을 손가락질로 가리키며 자랑스런 얼굴로 무어라고 중얼거렸다. 나는 또 고개를 끄덕이며 “하오! 하오!”를 되풀이했다.
산문을 지나 정문을 들어서니 산무데기 같은 큰 다락이 정면에 버티고 섰다. 현판을 쳐다보니 태허루(太虛樓)라 씌어 있었다.
태허루 곁을 돌아 안마당 어귀에 들어서니 정면 한 가운데 높직이 앉아 있는 가장 웅장한 건물이 법당이라고 짐작이 가나 그 양 옆으로 첩첩이 가로 세로 혹은 길쭉하게 눕고, 혹은 높다랗게 서고 혹은 둥실하게 앉은 무수한 집들이 모두 무슨 이름에 어떠한 구실을 하는 것들인지 첫 눈엔 그저 황홀하고 얼떨떨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