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바이스만이 말하듯 우리가 개념을 형성할 때 우리는 늘 어떤 특성만을 마음에 두고 모든 특성을 다 마음에 두지 않는다. 미래의 모든 가능성에 대비하지 못한다. 이러한 특성을 바이스만은 “열린 구조” 또는 “흐릿함의 가능성”이라고 불렀다. 그래야 변화하는 다양한 현실을 말로 담을 수 있다. 바이스만은 이러한 종류의 비결정성은 우리의 언어에서 완전히 제거될 수 없다고 보았다. 이러한 논의는 뜻같음에서 ‘정확하게’ 같음을 요구할 수 없으며 그 말의 현재 뜻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지 말아야 함을 말해 준다. 말뜻의 한계를 그어 놓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뜻같음의 기준을 아주 느슨하게 잡자.
외국어를 번역하는 데도 뜻같음의 문제가 있다. 번역을 뜻같음의 한 특수한 경우로 생각해 보자. 외국말과 뜻이 정확하게 똑 같은 우리말을 찾아낼 수 없는 것이다. 한문을 보기로 들면, 성리학의 근본 원리인 “성즉리(性卽理)”와 같은 간단한 표현도 정확하게 우리말로 제대로 번역할 말이 없다. “본성이 곧 이치다”로 번역하면 뜻이 달라진다고 할 것이다. 이런 말만이 아니라 성리학의 기본 개념의 하나인 “성(誠)·경(敬)”도 번역할 수 없다. 번역하면 말뜻이 달라진다고 이 표현들을 그대로 들여와 쓰면 옛날식의 이두 문장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된다. 신라의 향가에서는 중국 글자를 뜻으로 읽는 전통이 있었으나 그 뒤로 이 전통이 사라진 것도 이런 생각이 중요한 원인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말이 모자라기 때문은 아니다
번역에서 정확하게 대응하는 두 표현을 찾을 수 없는 것은 모든 언어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런 일이다. 뜻같음에 대한 이런 생각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쉬운 말을 골라 쓰자는 데는 물론이오, 헌법을 쉬운 말로 쓰고 <기미 독립 선언문>도 현대말로 바꾸는 데도 반대하게 만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