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그렇습니다. 우리의 전략은 영화의 개입입니다. 그건 두가지 의미 모두에서 입니다. 하나는 영화의 사방에서, 여러가지 형태의 개입을 통해서 그 중심으로부터 바깥으로 하나의 목소리를 여러개의 시선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여러가지의 영화 사이에 통로를 놓아 서로 이동하고, 교차하고, 대화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태평천국의 난에 빠진 것과도 같은 영화에서 친구들을 모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화의 이름으로 다시 이 싸움에 개입하려는 것입니다.
키노의 영화주의란 무엇인가? 더 나아가 키노가 내세우는 영화의 전략, 영화의 노선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 질문을 두가지 진영으로부터 동시에 들었습니다. 그 하나는 영화에 관한 진영이고, 또 하나는 영화에 맞서는 진영입니다. 우선 영화에 관한 진영, 이들은 영화의 산업 시스템 내부로 여기 저기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 내부의 모순 속에서 자기의 이해관계를 통해 `생산해낸` 질문은 사자와 여우들의 변증법(파레토의 그 무시무시한 사회학적 상상력에 따라서!)에 따라 이중의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이들은 대답이 준비되어있는 질문으로 함정을 만들고, 곤경에 빠트린 이후, 거기서 친구와 적을 가릅니다. 질문은 창백한 `영화주의`(?)의 미사여구로 가득차 있지만, 그래서 핵심주변을 빙빙 돌며 빠져나가는 질문이 모호하긴 하지만, 자기의 편이 아니면 금방 돌아서서 비난과 증오에 찬 적대감을 드러내거나, 아니면 가면 뒤에 칼을 숨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질문은 종종 경제적이거나, 아니면 `이윤`에 관한 시도가 됩니다. 이들에 대한 대답. 키노는 영화가 만들어내는 시스템의 생산양식이 중심과 주변을 지워나가고 있기 때문에, 그 질문의 방식이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영화는 자아가 없는 자본의 법칙에 따라 미디어의 속도 속에서 중심을 끊임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