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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어의 이 그림자에 가려 가까스로 오늘까지 남아 있는 이름으로는 나폴리의 우수한 교육자였던 트리토 Tritto(1733-1824)나 트렌토 Trento(1761-1833), 포르토갈로(1762-1830), 니콜리니 Nicolini(1762-1842), 나솔리니 Nasolini(1768-1806/16), 파리넬리 Farinelli(1769-1836), 오를란디 Orlandi(1777-1848) 등이 있지만 모두 너절한 작품의 작곡가들이다. 오스트리아인 빈터(1754-1825)나 바이글(1766-1846) 등도 당시의 작곡가들이다. 그 가운데서도 피에트로 카를로 굴리엘미(1765경-1817), 주제페 모스카 Giuseppe Mosca(1772-1839), 그 동생 루이지 Luigi(1775-1824), 발렌티노 피오라반티(1764-1837) 등은 개성을 듀지하며 활동하였다. 니콜라 안토니오 칭가렐리(1752-1837)가 한 역할은 중요하기는 했지만 부정적인 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나폴리에서 교육자로서의 재능을 발휘하였고 오페라 작곡에 있어서 1760년 이전의 원칙들을 존중하여 롯시니의 혁신에 반대했었다. 그러나 이미 혁신이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스테파노 파베시 Stefano Pavesi(1779-1850)의 성악 서법은 보다 인간적/근대적인 것이 되었고, 카를로 코차(1782-1873)와 피에트로 제네랄리(1773-1832)는 자기들이 크레셴도를 발명했노라고 유치한 주장을 했으나 그렇다고 그것 때문에 그들의 참다운 재능이 가려진 것은 아니다. 또 이탈리아의 일자리를 포기하고 드레스덴에 가서 그 고장의 이탈리아 극장에서 풍부한 재능을 발휘한 프란체스코 모를라키 Francesco Morlacchi(1784-1841)에게서도 그러한 징조가 보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요절한 니콜라 만프로체(1791-1813)는 <헤카베>(1812)에서 성악 및 오케스트라의 서법면에서 롯시니에 비길 만한 천재성을 보여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