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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제2기는 한민족의 3 ·1운동에 위협을 느낀 일제가 종래의 무단정치 대신 표면상으로는 문화정치를 표방하여 서둘러 관제를 고치고 한국말 신문의 발행을 허가하는 등 타협적 형태의 정치를 펴는 듯하였으나, 내면으로는 민족 상층부를 회유하고 민족분열 통치를 강화하였으며, 한국을 만주침략의 전초기지로 다지는 등 고도(高度)의 기만적 정치기술을 연출한 시기였다.
1919년 8월 3 ·1운동 뒤의 정국수습이라는 정치적 과제를 안고 제3대 조선총독에 부임한 해군대장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는 ꡐ일선융화(日鮮融和)ꡑ, ꡐ일시동인(一視同仁)ꡑ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① 군인[武官]에 한정되었던 총독의 문관에의 개방, ② 일본인과 한국인 간의 차별대우 철폐, ③ 지방분임(分任)주의, ④ 재래문화 및 습관의 존중, ⑤ 언어 ·집회 및 출판의 자유, ⑥ 경찰기관의 정비, ⑦ 인재등용의 문호개방 등의 시정방침을 제시하였다.
이에 따라 헌병경찰제도를 폐지하고 보통경찰제로 전환하여 경찰을 증강하였고 지방경찰의 업무를 도지사에게 넘겨 지방분임주의를 표방하였다. 또한 관리와 교원의 제복 ·착검(着劍)을 폐지하여 위압분위기를 없앴고, 태형(笞刑)을 폐지하여 벌금형으로 대치하였으며, 한국인 관리등용 범위를 넓혀 약간의 한국인을 총독부관리에 임용하고, 일본인에게만 한정하였던 보통학교교장에 한국인을 등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문화정치의 소산으로 《조선일보》 《동아일보》 《시대일보》 등 한국말 신문이 간행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전환의 표방이 목적의 포기가 아니라 단지 수단의 변경에 있었던 만큼 허식과 기만적인 것임은 필연적이었다. 무엇보다 사이토 이후에 조선총독이 된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로부터 마지막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에 이르기까지 문관의 총독은 하나도 없고 모두 육 ·해군 대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