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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이 대립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던 동업 조합 등의 특권이 폐지되었고, 이 대립을 얼마간 누그
뜨리던 교회의 자선 시설이 폐지되었다. 이제 봉건적 질곡으로부터 `소유의 자유`가 이루어졌지만, 이
유는 소부르주아나 소농민의 경우에 대자본과 대토지 소유자 사이의 세찬 경쟁에 압도되어 자신의 자
마한 소유를 바로 이 대부호들에게 팔아넘기는 자유를 뜻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자유`는 소부르주아나
소농민의 경우에는 소유를 잃는 자유가 되고 말았다. 자본주의적 기초 위에서 진행되는 공업의 급속한
발전으로 근로 대중의 가난과 궁핍이 사회 존립의 필수 조건이 되었다. 칼라일의 말에 의하면, 현금이
더욱더 이 사회를 연결하는 유일한 요소가 되어 갔다. 범죄 건수가 해마다 늘어났다. 멀건 대낮에 파
치하게 저질러지던 이전의 봉건적 죄악이 뿌리뽑히지 않은 채 밀려나기는 했지만, 그 대신 과거에는
직 비밀스럽게 일어나던 부르주아적 죄악이 그만큼 더 성행하게 되었다. 상업은 더욱더 사기가 되어
다. `박애`라는 혁명적 표어는 경쟁에서의 사기와 질투로 실현되었다. 폭력적 억압 대신에 매수가 나타
고, 칼 대신에 돈이 사회 권력의 가장 주된 지렛대가 되었다. 초야권(初夜權)은 봉건 영주에게서 부르
아 공장주에게로 넘어갔다. 매음이 유례없는 규모로 늘어났다. 결혼 자체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법적으로
승인된 매음 형태였고 매음의 공식적 가면이었으며, 무수한 간통으로 보충되었다. 한마디로 `이성의
리`로 채워진 사회·정치 제도는 계몽 사상가들의 눈부신 약속에 비하면 쓰라린 환멸을 자아내는 하나의
희화였다. 다만 이 환멸을 확인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직 없었을 뿐이었다. 그런 사람들은 새로운 세
에 들어서면서 나타나게 되었따. 1802년에 생 시몽의 『제네바 편지』가 나왔고, 1808년에 푸리에의
처녀작---그의 이론의 기초는 이미 1799년에 세워졌지만---이 나왔으며, 1800년 1월 1일에 로버트
오언이 뉴라나크의 관리를 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