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Ȟ력Ȟ4.2 강화출육설(강화출육설)
언제쯤 해인사로 왔는지 시기에 대한 논란은 있으나 강화도에서 새겨 해인사로 옮겨왔다는 설이 가장 널리 인정되고 있고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몇가지 주장을 보면 다음과 같다.
Ȟ살Ȟ 4.2.1 고려말설(고려말설)
이는 다카하시(고교형)라는 일본인 학자 등에 의하여 주장된 것으로서 고려말에서 이조 초까지 국왕이나 개인이 대장경을 인출한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신라때 부터 이조 숙종조에 걸쳐 시문을 모아 엮은 동문선(동문선) 68권의 박전지가 지은 영봉산 용암사 중창기를 보면 충숙왕 5년(1313) 임금은 구 대장경이 부식되어있음을 보고 이 절의 주지에게 명하여 새로이 인출하여 봉안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 내용중에 {취강화판당인출궐함궐권궐장이래}라는 구절이 있어 강화판당에서 인출하여 가져온 것을 알 수 있어서 이때까지도 대장경판은 강화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동문선 76권에 보면 이숭인이 지은 신륵사대장각기(신륵사대장각기)가 있는데 이는 이색이 우왕 7년(1381)에 죽은 부친의 뜻을 따라 대장경을 인출하고 신륵사에 대장각을 세워 안치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또 이숭인의 도은집(도은집)에는 {수암장로인장경우해인사헌정}이라는 시(시)구절에서 수암장로가 해인사에서 대장경을 인경하여 바쳤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상의 자료를 근거로 대장경판을 해인사로 옮겨온 것은 고려충숙왕 5년(1318)에서 우왕7년(1381)에 걸치는 63년간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유일한 근거라고 할 수 있는 수암장로 시구절의 {장경}이 지금도 해인사에는 고려 중기 및 말기에 새긴 삼본화엄경등 사간(사간)경판이 많이 있으므로 이것이 정장 고려대장경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이유 등으로 거의 인정을 받고 있지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