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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한국의 교육학
일본의 고대문화는 주로 한국을 통하여 중국문화를 수입하였던 것인데, 근대에 와서 한국문화는 주로 일본을 통하여 서양문화를 수입하였다.
한국에서 교육학 논의의 역사는 짧다. 그 이유의 하나는 갑오개혁으로 문호가 열리기는 하였으나 잇달아 일본의 식민통치가 시작되어 한국의 문화는 일본문화에 강제 동화(同化)의 비운을 맞게 되었기 때문이다. 1906년 유근(柳瑾)에 의해 《교육학원리》라는 제목으로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월보에 교육학의 체계가 연재됨으로써 비로소 교육학의 신기운을 맞이하였고, 1908년에는 정영택(鄭永澤)에 의하여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월보에 《교육학》이 다시 연재되었지만 그후에는 일본의 강점(强占)에 의한 식민통치로 말미암아 한국의 교육학은 더 이상 발달할 수 없었다. 다만 식민통치기간 중에 와신상담으로 교육학을 착실히 연마한 선인들이 있었다. 최현배(崔鉉培)는 일본의 히로시마[廣島] 고등사범을 거쳐 교토[京都]제국대학에서 교육학의 신학문을 연구, 1926년부터 연희전문학교에서 교육학을 강의하는 한편 교육적 구국일념으로 《조선민족갱생의 길[朝鮮民族更生之道]》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일찍이 그가 페스탈로치 교육학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후, 광복되기까지는 일본의 한국민족혼 말살정책으로 한국의 교육학은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다가 미국 컬럼비아대학교에서 교육학을 공부하고 J.듀이의 영향을 받은 오천석(吳天錫)이 1946년 《민주주의 교육의 건설》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것은 독립한국의 교육적 좌표로서 시의적절한 것인 동시에 당시 그가 문교책임자였던 점에서 한국교육학의 토착화 방향을 제시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을 뿐 아니라, 실지로 교육학의 발전을 교육 실천을 통해 이룩하고자 하는 실용주의적 경향을 토착화하는 데도 많은 공헌을 하였다.
1948년에 정부가 수립된 후 미국의 학제를 따른 단선형학제(單線型學制)가 채택, 실시되기에 이르자 교육학은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맞게 되어 한국의 교육학이 나타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