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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해방 후 채 2년도 못되는 기간 동안에 미소 양군이 점령했던 남북한에는 서로 다른 정치질서의 바탕위에서 서로 다른 정치체제가 구축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같은 국내외적인 구조적 상황은 남북한 분단정권 수립의 가능성을 높이고 있었다. 그러나 1947년의 중반의 시점에서 볼 때, 이제까지 남북한 각각에 독자적인 정치질서 및 정치체제가 구축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곧장 남북한 분단정권의 수립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미소공위를 통한 타협의 가눙성이, 즉 마지막 기회가 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947년 5월 21일 재개되었던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는 협상결과 6월 초 공동성명 제11호 내용에 합의했는데, 이에 따르면 공위 구두협의에 참여하고자 하는 각 정당·사회단체들은 모스크바결정의 목적을 지지하고 조선임시정부 조직에 대한 미소공위 결의를 고수하고 신탁통치(후견)에 관한 제안을 작성하는데 협력한다는 내용의 선언문에 서명날인하여 그 선언문을 첨부한 청원서를 제출토록 되어 있었다.4) 물론 이 합의는 임시정부 수립의 출발점에 불과했지만, 교착된 공위협상에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공동성명 제11호가 발표됨에 따라 남북의 정당·사회단체들은 미소공위에 청원서를 제출했는데, 청원서를 제출한 정당·사회단체들의 성향은 다음과 같다
이상의 내용을 볼 때, 공위협의에 참가신청을 낸 정당·사회단체의 회원수에 있어 범우파 대 범좌파의 비율은 약 반반으로 거의 비슷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남한 우파세력이 자신들의 공위 참여 단체수와 회원수를 지나치게 부풀림으로써 나타난 이같은 결과는 소련측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