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처음에 ‘장춘서 회령까지 스무하루를 두고 온 여정이었다.’로 이 소설은 시작된다. 주인공인 ‘나’의 귀로에는 광복의 감격도, 고통스러웠던 식민지 체험에 대한 푸념도, 새로운 각오나 희망도 끼어 들지 않는다. ‘나’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뜻밖의 광복을 맞이하여 거의 무감각하게 무개 화차에 올라탔고 피난민 대열에 휩싸인다. 여기서 귀환 동포 대열을 ‘나’가 ‘피난민’이라고 지칭하고 있는데 이는 주목되는 사항이다.
‘나’는 광복을 맞이한 우리 동포들이 패망한 일본을 어떠한 태도를 바라보고 있는지 관심을 갖게 되는데, 청진에서 만난 두 사람이 그 반응의 실상을 보여 주는 극단적인 예가 된다. 하나는, 광복 이후의 시대를 걸머지고 나아갈 소년으로, 일본인들의 거동을 샅샅이 위원회에 고발하여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서 벌떡 일어설지도 모른다.’면서 일본인에 대한 철저한 증오심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다른 하나는, 청진 역 근처에서 국박을 팔고 있는 노파인데, 이 노파는 일제에 의해 아들을 잃어버렸으나, 아들과 함께 일본 통치의 비리를 폭로하다가 죽은 일본인을 생각하면서, 패망한 일본인들의 거지 행색에 오히려 동정과 연민의 눈물을 흘린다. 이 두 사람을 통하여 ‘나’는 광복의 격앙된 흥분 상태와 균형을 잃어버린 증오심을 확인하기도 하고, 패자에게 보내는 동정과 그 밑바닥의 더 큰 비애를 맛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