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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튼에서 비교적 한가한 생활을 끝마치고, 이탈리아 여행길에 오른 것은 1638년 4월이었다. 밀턴은 이 여행에서 만소와 실명한 노천문학자 갈릴레오를 만났다. 거기에서 다시 그리스 여행을 떠나려 했을 때 국내에서 제1차 감독전쟁인 내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결국 밀턴은 그리스 여행을 중단하고, 외유 1년 3개월만인 1639년 7월말 경에 귀국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내란은 평정되어, 그는 런던에 사숙을 열고 조카들을 가르치며 조용히 정세를 관망하였다.
그러나 1640년에 제2차 감독전쟁이 터져 결국 영국군은 대스코틀랜드전 에서 대패했다. 장기 의회가 소집되고, 그의 옛 은사였던 토머스 영이 국교회와 싸우게 되자, 이에 자극받은 밀턴은 귀국한 지 2년만에 논단에서 자유를 절규, 논쟁과 정쟁의 와중에 몸을 던지게 되었다. 이 당시에 그는 종교적 자유, 가정적 자유, 정치적 자유를 제창하는 수편의 산문을 썼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언론출판의 자유를 주창한 글 《아레오파기티카》이다.
1645년 6월 이후 전세는 급전하여 왕당파가 패배하니, 잔존 의회는 형식적인 재판을 거쳐 찰스 1세를 폭군・살인자・국가의 적이라는 명목 아래 사형했다. 드디어 영국은 공화국임을 선포하게 되었고, 1660년의 왕정복고까지 11년간 영국을 지배하게 된다. 왕이 처형되고 공화 정부가 수립되자, 밀턴은 크롬웰의 라틴어 비서관으로 발탁되어, 주로 외교문서의 번역과 대외적 선전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런 정치적 격무로 해서 결국 그는 그나마도 불완전했던 시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이와 같이 밀턴은 약20년간을 정치를 위하여 그 아까운 시재를 낭비했다. 그러나 그의 20여 년간의 정치적 체험은 후기의 대작을 쓰는 데 있어서 유익한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