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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商團事件과 國民會議運動
국민당이 현실적으로 당면한 과제는 혁명근거지로서의 광동군정부의 안정이었다.
광동군정부가 현실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재원은 주로 광주시의 세수입이었다. 세
수입의 증대를 위해서 광주시정청은 사원·공공재산의 매각, 房捐의 豫徵, 상인들에
의 寄附金割當, 각종공채의 발행 등의 방법을 사용하였는데 광주시민 특히 상인에
대한 重稅政策은 상인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상관습을 무시한 시정청의 조치
에 대해 상인들이 파시로 맞서면서 각지의 상단을 광주에 집중시키자 결국 정부는
統一馬路業權案의 취소를 결정하였다. 이같은 군정부와 상인간의 충돌을 계기로 광
동총상회를 중심으로한 상인층은 1924년 5월 상단연방을 조직키로 결의하고 8월에
는 상단연방총부를 정식으로 성립시켰다. 상단연방이 출현하게 된 데에는 객군의
수탈과 군정부의 중세정책에 대한 상인층의 대응이라는 측면이외에 국민당의 노동
정책에 대한 상인층의 위기의식도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5월 1일 노동절 축하행진
시 노동자와 상단의 충돌로 사상자가 발생하자 국민당의 요중개는 상단에 대처하는
방안으로 공단군의 창성을 촉구하였다. 그리고 이처럼 증가하는 노동운동에 대해
상인들은 위기감을 느꼈다.
군정부로서는 중요한 재정적 기반이었던 상인측과의 직접적 대결을 피하려고 하
였다. 그러나 8월 상단측이 구입하려 한 대량의 무기를 군정부가 압수함으로써 군
정부와 상단측간의 대립은 거듭되었다. 상단측과 정부의 계속되는 충돌결과 상업중
심지 西關을 포격하겠다는 위협을 하였다. 그러나 객군에 의존하는 군정부체제가
유지되는 한 상단과 제국주의에 대한 전면적 대결은 피해야 했다. 상단사건이 진행
중인 1924년 9월 국민당은 손문의 지도하에 북벌에 나섰다.
이 북방군벌에 대한 군사행동의 배후에는 객군을 북벌에 동원함으로써 광동군정
부의 재정적·군사적 부담을 줄이려는 현실적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