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삼국사기`는 고려중기의 대표적인 유신(儒臣)이 왕명에 따라 당시까지의 전존사료(前存史料)를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사관(史官)의 위치에서 삼국 및 통일신라의 역사를 편찬한 이른바 정사이다. 해동고승전 역시, 경북오관산 영통사 주지 교학사자사문이란 직계를 가진, 당시의 대표적인 교학승(敎學僧)이 역시 왕명에 의하여 가능한 편의를 제공받아 편찬한 일종의 불교사이다. 그러니 이 두 사서는 각기 삼국시대의 사회일반과 불교계에 관한 두 가지 정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정사가 엄존하는 데도 일연은 어째서 다시 승,속의 사실을 혼성하여 `삼국유사`를 새로이 찬하게 되었던 것일까.
그야말로 선열(禪悅)의 여가에 `다만 일사유문`을 편의해 찬집(纂集)`한 것이었을까. 그러나 그처럼 <불용의(不用意)한 일만록(一漫綠)>이기에는 너무나 광박(廣博)한 고증의 각고가 여기에 기울여져 있음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삼국유사` 불과 5권에 인용된 고증서목(考證書目)은, 오히려 `삼국사기` 50권의 것보다 그 다양함이나 치밀함에 있어서 전혀 비교가 안될 정도로 압도적이다.
더구나 이 가운데에는 일연 자신이 직접 답사하여 목도점검(目覩點檢)한 것도 상당수에 달한다. 이같이 광범한 사료의 수집은 장기간에 걸친 용의주도한 노력을요한다. 이 노력이 더구나 30년의 처절한 대몽항전과 화맹에 잇대어진 난세 속에서 경주되었음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이 같은 여러움을 딛고 선 서사는 필연코 어떤 새로운 인식의 산물이었으리라 할밖에 없다. 결국 `삼국유사`는 저 `삼국사기`나 `해동고승전`과는 입장을 달리하는 자국의 역사전통에대한 찬자 일연 자신의 어떤 새로운 인식에서 우러난 서사였다고 하지 않을수 없다. 이 새로운 인식은 어디서 발원한 것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