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주어[주체]라고 생각될 수 밖에 없는 존재는, 주어로서만 실재하는 것이다. 즉 실체(실체)다[대전제].
생각하는 존재는, 한갓 생각하는 것으로만 보아진다면, 주어[주체]라고만 생각될 수 있다[소전제].
그러므로, 생각하는 존재는 주어[주체]로서만 실재한다. 즉 실체로서 존재한다[결론].
그는 설명하기를 대전제에서 진술된 존재[주어]는 직관 중에서도 주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소전제에서 진술된 존재는, 사고와 「의식의 통일」에 상관(상관)해서만 주어로 보아지되, 객체로서 직관에 주어질 수 있는 주어는 아니라고 한다. 따라서 여기서 “매개념다의(매개념다의)의 오류”가 생겨서 잘못된 오류가 도출되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주어를 대전제에서는 직관이 가능한 주어로, 소전제에서의 주어는 직관이 불가능한 주어를 같은 것으로 여겨서 이러한 잘못된 추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추리를 마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인다. 그에 의하면, “사물의 개념이 실체의 이름 아래서 주어질 수 있는 객체를 표시할 것이라면 즉 개념이 인식이 되고자 하면, 지속적 직관이 그 개념의 객관적 실재성에 대한 필수(필수) 조건으로서 근저에 두어져야 한다. 즉 직관이, 대상이 주어지도록 하는 유일한 것으로서 근저에 두어져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칸트에 의하면 이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에 의하면 우리의 내적 직관은 아무런 지속력을 갖지 못하고, 따라서 실체의 개념을 가질 수 없고, 그것의 단순성 역시 증명할 수 없다. 우리는 사고 일반에 있어서의 자기의식(자기의식)의 논리적인 질적(질적) 통일성(통일성)만을 가질 뿐이다.
이로써 재판에 준하여 초판과 재판의 영혼론의 차이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칸트가 초판을 쓰고, 그것에 대한 해설서로 쓴 “프롤레고메나”를 발표한 후에 재판을 쓰기까지 시대적 상황은 어떠했는가? 본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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