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Ⅱ. 5·4학생운동의 배경
1. 제1차 세계대전과 황금시대
신해혁명은 중국의 정치체제를 전제왕조에서 공화정으로 변화시킨 사건이었다. 민국혁명과 공화정의 수립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민주주의는 진전되지 않고 다음시대에 넘겨졌고 혁명의 결실은 원세개를 위시한 봉건군별에게 탈취당하고 말았다. 또한 제 1차 세계대전은 중국을 둘어싼 제국주의 열강의 권익 쟁탈전의 양상을 일변
시켜 중국을 일본의 독점장으로 만들었다. 이에 따른 `21개조 요구`중국민들에게 망국의 위기를 절감하게끔 하였다.
1912년 10월에 원세개가 동원한 공민원의 포위하에서 국회는 원세개를 손문의 뒤를 이어 중화민국의 대총통으로 선출하였다. 원세개는 대총통에 취임한 후 국회를 해산하여 자신의 독재정치를 실시하엿다. 그는 자신의 정권유지를 위하여 강력한 군대 육성을 필요로 하엿고 여기에 중국내 이권을 장악하려는 서구열강의 이해 관계가 일치해서 민국 2년 善後大借款이 성립되었다.
선후대차관은 鹽稅수입의 전부를 담보로 제공하는 조건으로 2500만 파운드에 달하는 액수로 지급되엇다. 또한 차관을 사용하는데에도 5개국(영, 불, 독, 일, 로)의 감독하에 둔다는 불리한 조건이었다. 원세개의 독재의 재정적 기반을 위한 차관도입으로 중국은 점점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되어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1914년 7월에 1차 세계대정이 발발하여 서구열강의 중국에 대한 관심이 약화되자 일본은 이 기회를 틈타 중국내 진출을 강화해 나갔다. 이 시기 일본의 침략행위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1915년 1월 18일 駐華日本公使 日置益이 전달한 21개조의 요구이다. 일본은 英日同盟을 대의명분으로 독일에 선전포고하고 독일의 조차지인 膠州灣 일대의 점령작전을 개시하였고 이어 `산동권익`에 대해 일독 협정에 따른다는 대중국권익의 요구를 원세개에게 제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