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수혈식 석곽묘의 확산
낙동강하류역에 있어서 5세기 전반대까지는 중심고분으로 대형목곽묘가 계속 사용되었음이 확인되었으나, 4세기중엽부터 김해의 주변지역을 관할하던 중간지배자계층에서 사용하던 수혈식석곽묘가 등장한 이후 4세기후반 제가야지역의로의 급속히 확산되었는데, 이는 당시 대외교역을 담당하였던 김해 일원의 중간지배자계층이 경상도내륙지방의 제가야국들과 교류·이주한 증거로 상고된다. 이와같이 타지방으로의 이주·이동은 고구려, 신라로부터 오는 직접적인 전란을 피하기위해 그곳으로 이주·정착한 것으로 사료된다. 경남 김해시 칠산동고분군(1지구6호분· 3지구 27호분)(주) 및 부산 화명동고분군(5호·2호·4호·7호)(주) 김해 양동리93·95등에서 확인된 4세기중엽 출현기의 수혈식석곽묘들은 모두가 장방형의 평면형태이며, 이들의 특징은 석재의 개석을 가지지 않는데 있다. 이와같이 목재대신 돌을 채용하여 등장한 수혈식석곽묘는 가야중기·후기 가야사회의 주된 묘제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이와같은 보수성이 강한 장제법의 변화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존의 내세관의 변화 및 사후세계의 관념의 변화를 뜻하는가 그리고 이러한 대형목곽묘를 사용하던 금관가야의 최고 지배자계층은 과연 어디로 갔는가? 왜냐하면 김해지역에 대형목곽묘는 5세기전반으로서 그 자취를 감춘다. 이러한 것은 고구려·신라군의 침입에 따라 전기가야가 멸망할 때 전기가야의 맹주국인 금관가야의 최고 지배자계층은 고구려군에 의해 멸망당했거나, 아니면 전란을 피한 최고지배자계층중 일부가 바다를 건너왜국으로 이주하였을 것으로 추론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