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잔돈의 집’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서 [민중의 집]은 주로 노동자의 교류・연대 활동, 상호부조 활동, 교육・학습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알빗자니 씨의 말은 처음에는 냉정하고 차분한 어조였으나 점차 열기를 띄어 손짓 몸짓을 섞어가며 인터뷰를 하였다. ‘이탈리아 인은 손으로 말을’ 하기 때문에 ‘이탈리아 인을 조용히 시키고 싶을 때는 손을 묶어 두면 된다’고 하는데 완전히 그대로였다. 자신이 발굴한 자료의 설명도 섞어가며 알빗자니 씨의 설명은 점차 이 지방 근대 사회 운동사의 강의로 되었다. 그 모두를 여기에서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요점만 소개하겠다. 교회의 영향력(그것은 ‘요람에서 무덤에 이르기까지’ 인생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다)이 노동자・농민에게 뿌리내리고 있는 가운데 [민중의 집]의 교육・학습 활동은 다양한 민주주의 사상을 민중에게 전파하는 ‘민주주의 교육 센타’로서 역할했던 것이다. ‘부르주아지에게 있어서 도시는 프롤레타리아에게 있어서 [민중의 집]’ ‘[민중의 집]은 장래 협동 사회의 맹아이다.’라는 당시의 표현은 근로 인민에게 있어서 [민중의 집]이 가졌던 의의를 잘 드러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볼로냐를 포함한 에미리아 지방은 1903년에 이미 371개의 사회당 지부와 15039명의 당원을 갖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볼로냐 시에서는 32개의 지부가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 지부의 대부분이 [민중의 집] 내지 그것에 가까운 써클을 다른 민주 조직과 함께 운영하고 있었다. 어떤 [민중의 집]은 [잔돈의 집]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노동자・농민의 몇년에 걸친 소액 모금에 의하여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노동자 자녀를 위한 보육과 여름 학교 등의 활동도 혁신 시정 아래에서 추진되었다. 제 1차 대전이 발발한 1914년에는 독일에 침략당한 벨기에의 전쟁 고아를 받아 들여 보살펴 주는 국제 연대 활동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