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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계의 교학실천은 31세 때 덕산을 찾아 종유하면서 시작된다. 이후 곧 바로 진사시에 급제한 그는 태학에 들어가 체계적으로 공부를 하므로써, 38세 10월에 드디에 출사하게 된다.
이때 남명이 그에게 특별히 행도에 유념하라는 훈계를 간직하면서 정치적인 관직보다는 교학할 수 있는 한직을 원하여 성주 훈도로 유생을 가르친다. 이때 정한강은 13세 나이로 덕계에게 주역을 배웠다. 덕계 자신은 전술한 바와 같이 빈한한 가문에서 성장하여 현관이 되기는 어려웠으나 학문정신이 실천과 연결되어 이조전랑에 이른다. 덕계가 관계에 진출한 이유가 의를 실천하기 위해서다.
발총개당세지군자야 국은월심민병난망이 종불가호불사지무의칙 우위지민면복사이궁일호췌췌야 입미원이유지보습궐유지위급
관직에 머물면서 육재에 힘썼고 사우간에 도의를 돈독히 하여 학통에 비중을 많이 두었다.
1) 남명의 훈도
사우지도는 학문의 형성을 가져 주고 의로써 맺어지는 학통이라고 볼 수 있다. “범사우운자 필상규이의 상면이선”이라 하여 사제간의 관계는 문인이 스승에 대한 존봉과 사설의 계승 천명을 당연한 의무로 여기게 된다. 그러므로 사제의 만남은 순수한 인간의 모습을 변화시키고 발전시키는 교육적 의미가 있다.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학통이 동양의 교학에서는 더욱 깊어서 시공을 초월한 인간관계가 형성된다. 그래서 도통이 확립되어 교육문화가 부단히 계승하게 된다. 도통이 공자 이후 유가사상의 맥락을 반영한 것으로 후일에 와서 유학을 추숭하는 소이가 되었다.
덕계와 배신이 한 침상에서 공부하는 것을 남명은 흡족하게 생각하였다. 남명이 제자 배신보다는 덕계에게 행도를 소중히 하라고 한 것으로 보아 스승의 각별한 훈도가 필요했던 것 같다.
“내가 경여에게는 벼슬에 나가도록 권하면서 자강에게는 당겨서 물러나도록 했는데, 벼슬해서 녹을 받은 것과 도를 행하는 것이 오로지 다른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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