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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제도의개혁 : 개혁의 실상과 한계
조선왕조는 명백한 신분사회였다. 양반은 지배층으로 그리고 중인은 중앙과 지방의 행정부서에 세습직으로 복무한 준 지배층으로서, 지배층과 피지배층인 상민간의 공적인 연결고리로서 사화안정에 기여했다. 그리고 천인은 양반사가나 관아에 부속된 노예적 신분이었다.
이런 신분상의 엄격한 차별적 구도가 조선왕조 후기부터는 양반 가가 격증하고 또 양반의 첩제도의 공인으로 서자인구가 격증하고 그에 대한 사회문제가 야기되었다. 여기에 평등주의를 강조하는 서구종교와 그 문화충격, 그리고 밑으로부터는 융기하는 민중의 각성과갑오농민전쟁등은 신분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런 격동하는 신분사회의 구도속에서 가장 가치박탈감이 심한 계층은 양반가의 서자들과 중인계층이었다.이들 서자, 중인출신이 갑오개혁세력의 실세들이었기에 그들은 신분제도와 양반세력가인 문벌의 타파를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이다. 그 내용은 군국기무처에서 의결된 “문벌과 반상의 차별을 없애고 귀천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할 것” “ 공사간의 노비문서를 없앨 것”등에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조혼을 금하고과녀의 재혼의 자유를 의결하였다.그러나 노비혁파안이 발표되어 노비의 상전에 대한 행패가 심해지자 개혁정권은 양반가노비들의행패를 금하고 노비의 호를 상전의 호에 붙이지 말고 분호할 것을 주장하며 노비 해방문제에 대한 다른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들이 주장한 신분타파는 선언적 의미가 강했으며 양반유생들의 존재를 전면적으로 부인한 것은 아니었다.또 서얼의 지위향상을 위해서 군국기무처가 결의한 “정실이나첩의 아들이 없을 때 양자를 들이는 것을 허락한다. ”라는 의안은 별로 효력이 없었다. 그리고 서얼출신 양반들은 적서에 대한 족보상의 차별기재 및 상속의 차등화라는 차별의 벽을 허물지는 못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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