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우리는 벤치에 다가가서 앉았다. 그리고서도 얼마 동안 평범한 소식을 주고받으면서 대화를 질질 끌었다. 그녀는 내 일에 관해 궁금해 했다. 나는 마지못해 대답을 했다. 이제는 내가 일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는 걸 그녀가 알아 줬으면 싶었다. 그녀가 전에 나를 실망시켰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는 내가 그녀에게 실망을 느끼게 해주고 싶기도 했다. 생각대로 되었는지는 지금도 모르지만, 아무튼 그녀는 조금도 그런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나로선 원망과 사랑이 동시에 마음에 가득차 있었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퉁명스럽게 말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이따금 북받쳐 올라오는 감동에 말소리가 떨려 나와 스스로도 원망스러웠다.
조금 전부터 한조각 구름에 가리어 있던 석양이 우리 맞은 편 지평선에 닿을락말락하게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텅 빈 들판을 물결치는 듯한 낙조로 가득 채우고, 우리들의 발 밑에 퍼져 있는 좁은 골짜기를 갑자기 붉은 빛으로 메우다가 이윽고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그것에 현혹되어 말없이 앉아 있었다. 나는, 원망하는 마음이 사라지게 하는 그런 금빛 찬란한 황홀감이 아직도 나를 감싸고, 온몸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이젠 내 마음 속에서는 사랑의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나에게 몸을 숙인 채 기대고 있던 알리사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브라우스 속에서 얇은 종이로 싼 아주 섬세한 작은 상자를 꺼내, 내게 그것을 내밀려다가 그만둬 버렸다. 망설이는 것 같았다. 내가 놀라서 그녀를 쳐다보고 있으려니까,
`제롬, 들어봐 여기에 들어 있는 건 내 자수정 십자가 목걸이야. 오랜 전부터 네게 주고 싶었기 때문에 사흘전부터 가지고 다녔어.`
`나보고 이걸 어떡하라는 거야?`
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