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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는 ‘기술 연관’이란 가령 자동차를 만들면 도로를 놓아야 하고, 거기에 신호등을 설치하며, 자동차의 연료 탱크를 마련해야 하는 등 일련의 기술 조작이 확장적으로 연계돼 인간과 사회를 조직한 상태를 말하는데, 그것이 곧 현대문명 사회의 특징이다.
이런 상황 변화에 따라 전래의 것과 다른 새로운 윤리가 설정돼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예컨대 냉담한 의사의 경우처럼 ‘우수한 기능을 가진 사람이 실제적으로 사랑의 실현에 공헌한다는 사실’을 ‘기술 연관’ 속에 사는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그런데 이 철학자는 그렇다고 해서 ‘우수한 기능인 사회’를 존경하고 있지는 않다. 기계 연관의 세계가 가진 특성들이 사람들을 너무나 비인간적인 상황으로 밀고가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의 하나가 ‘내면 소거’란 것으로, 인간이 기능적으로만, 그것도 효율성으로만 대면하기 때문에,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덕성과 품위의 대면은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이 기술 연관 세계에 대한 경각심은 이런 시대의 인간이란 ‘신호적 존재’로 변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그의 말을 정확히 인용하면 인간은 부품화 결과로 신호적 반응에 충실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됐다는 것이다. 건널목에서 빨간 불이 켜져 있으면 걸음을 멈춰야 하고, 파란불이 켜져야 길을 건너게 되는 행동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 신호 반응은 이의와 반성을 허용하지 않고, 거의 무의식적으로 대응하게끔 돼 있고 더욱이 그것을 잘 지켜야 모범 시민이라는 칭찬을 받는다. 우리는 그냥 신호에 따라 그것이 지시하는대로 움직이는 것이 당연하며 왜 그래야 하는지 따지지 않는다. 그것은 그렇게 돼 있으니까, 그렇게 해야 할 뿐이다.
이마마치는 여기서 히틀러나 스탈린 시대의 국민들이 주체적으로 사유하고 그 연유를 질문하는 일 없이 모든 행위를 권력의 하명에 따르는 전체주의적 구조를 발견한다.
지금 이 시간 컴퓨터 앞에 앉아서 휴대폰을 사용하는 사람을 예로 들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