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레위기의 희년법은 그 내용이 대단히 혁명적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실현방식이 비혁명적, 아니 반 혁명적이기도 하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희년이 속죄의 날에 선언된 것과 부자와 권력자들의 자발적인 기득권 포기가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 그것을 반증한다. 부자와 권력자들의 기득권의 포기는 속죄의 열매이고, 가난한 민중의 기본권의 회복은 새로운 관계의 시작의 씨앗이라는 말이 아닐까? 사회변혁의 길로서 혁명의 가능성을 배제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혁명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 오늘의 변화된 상황에 절망할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부자와 권력자들의 태도의 변화, 자발적인 기득권의 제한과 포기없이는 인류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공멸의 위기에 함께 처한 현실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변혁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인가? 변혁의 목적은 적의 말살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의 시작, 곧 공생에 있는 것이 아닐까? 희년신학은 혁명의 신학도 타협의 신학도 아니다. 희년신학은 현실적인 신학일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혁명이냐 수구냐, 변혁이냐 안정이냐, 환경이냐 발전이냐라는 이분법적 양자택일을 더 이상 현실적인 대안으로 허락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은 가장 비현실적인 선택일지도 모른다.
희년의 네 번째 신학적 가능성은 그것이 신앙공동체의 자기 개혁을 위한 도전이라는데 있다. 레위기 희년법을 제정한 집단이 포로기 이후 귀향한 가난한 레위인(민중사제)들이라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포로기 이후, 국가건설의 이념을 희년법 정신 위에 세우려는 민중사제들의 개혁의지가 반영되어 있지만, 유대 민족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진다. 그러나 이사야를 거쳐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선포된 희년은 세계사적이고 종말론적 성격을 가진다. 희년은 또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실현된 사건으로 경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