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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바르트가 태어난 유럽 독일어권 국가의 신학적 상황은 개신교 자유주의의 절정기로 표현될 수 있었다. 개신교 자유주의는 기독교가 도달한 최고의 상태를 국가와 교회, 문화와 신학, 윤리와 신앙간의 조화와 일치에서 발견했다. 따라서 교회는 그들의 정부가 제3세계의 민족들을 식민화하건 외국과 제국주의적 전쟁을 시작하건 간에 정부를 지지했고, 고도로 발달된 유럽문화와 예술, 학문은 기독교 신학의 둘도없는 동지가 되었으며 신앙은 곧 윤리를 의미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상화된 세상과 기독교의 합일의 꿈은 1914년의 세계 제1차대전에 의해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바르트 역시 그의 부친이 신학교수로 봉직했던 스위스의 베른과 독일의 베를린, 튀빙엔, 마르부르크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자유주의의 거장들인 아돌프 폰 하르낙과 빌헬름 헤르만의 영향아래 자유주의의 창시자인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에 심취했다. 그러나 바르트가 이러한 자유주의 신학에 반기를 들고 하나님의 말씀 중심의 신학을 시작하게 된 데에는 두 가지의 중요한 경험이 뒷받침된다. P. Stuhlmacher, Vom verstehen des Neuen Tastaments, 2 Aufl. Vandenhoeck & Ruprecht, 1986, 175쪽.
첫째, 1909년부터 1921년까지의 스위스의 자펜빌에서의 목회를 통해 그는 자유주의 신학의 화려한 학문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살아계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육체로 오셔서 인간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교하고 그들의 곤경과 희망을 배려하면서 목회하는데 아무 도움도 줄 수 없음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