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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높이 날아올라 더 넓은 세계를 조감했던 웅대한 안목의 학자였다. 그의 독창적인 교판과 화쟁사상의 전개에는 불교사상 전체를 조감할 수 있는 큰 안목이 뒷받침되었던 것이다. 원효 교학의 독창성은 교상판석에서 돋보인다.
종래 중국의 교판가들은 흔히 종파주의적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한 경향이 있었지만, 원효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종래의 잘못을 바로잡고 공평한 판석을 내렸다고 평가받고 있기 때문이다. 원효의 학문 활동은 삼십대 젊은 시절부터 육십 만연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계속되었다.
전 생애에 걸친 끝없는 정진에 의해 그는 1백여부 2백40여권의 저서를 남긴 대저술가로도 불린다. 약간의 혼란이 있는 저술목록을 감안하더라도 그가 90종에 가까운 저술을 했음은 사실이다. 그는 신라 뿐 아니라 당시 동아시아를 통틀어서 그 양과 질에 있어서 최고 수준의 저술가였다.
사실 한국불교 역사상 원효를 능가하는 저술가는 없다. 의적은 25부, 도흥은 40여부,태현은 50여부의 저술을 남겼지만 원효에 비할바는 못된다. 중국의 학승도 원효를 따르지 못했다.
천뉴 30여부, 법장은 50여부,백본소주로 불리는 규기의 경우도 50여부의 저술을 남겼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원효의 많은 저서 그 대부분이 우리 나라를 비롯하여 중국 및 일본 전해져 높이 평가되고 많은 영향을 주었기에 더욱 의미 있는 것이다.
원효의 사상은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그를 화엄가, 법상가, 정토가 등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지만, 모두 한 측면에서만 주목한 결과이다. 또한 그의 사상적 토대를 여래장사상, 화엄사상, 유식사상 등으로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원효사상의 특징으로는 화쟁사상이 흔히 거론된다. 그가 살았던 7세기는 다툼의 시대였다. 한반도는 전쟁의 와중에 휩싸여 있었고, 사람들은 신분으로 갈등을 빗기도 했다. 그러나 원효는 화쟁사상을 전개함으로써 `백가의 이쟁을 화합하여 지극히 공평한불의를 얻었다`는 평가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