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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진보적 역사학자 홉스봄이 “극단의 시대”라고 부른 20세기는 새로운 밀레니엄을 불과 한 해를 앞두고 냉전시대의 유산과 탈냉전시대의 이상향 사이의 경계에 머물러 있다. 에릭 홉스봄, <극단의 시대:20세기 역사>, 이용우 역, 까치, 1997. 탈냉전시대에 증폭되고 있는 발칸반도와 전 유고, 소말리아, 동남아의 인종적 민족주의 분쟁과 이에 따른 인종청소와 전쟁강간과 같은 폭력적 현실은 사실 근대화의 유산이다. 19세기 이래 세속 이데올로기로 종교화한 민족주의와 공권력과 법의 독점을 통한 국민국가의 성장과 확대는 근대화의 본질적 특징이었다.
1989년 소련과 동구의 공산주의 영역이 와해되고 냉전의 종식을 뒤이은 것은 유토피아와 평화가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과 인종간 국가간의 분쟁으로 인한 무정부 상태이다. 20세기 후반 국경을 초월한 지구촌과 세계화 시대에 국가와 주민 사이의 일체감이 와해되고 인종주의와 종교 근본주의 등에 근거한 국지적 분절이 심화되면서 새로이 나타난 현상은 파괴수단의 민주화와 사유화로 인한 소규모살상이다. 폭력과 파괴가 지구상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양대 세계대전과 같은 총력전 시대에서는 국가에 의한 공식적인 폭력과 대량살상이 정당화될 수 있었으나, 탈냉전시대의 혼란은 비공식적인 폭력의 통제가 불가항력적인 상태에 이르게 되면서 생겨났다. 오히려 폭력의 통제보다는 민족과 인종, 그리고 종교의 이상향을 회복한다는 명분아래 제도적 차원에서 폭력이 정당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예컨대 통일 독일에서는 신나치 집단에 의한 외국인에 대한 증오와 테러가 민족적 정체성 회복이라는 집단적 합의하에 사회적으로 용인받고 있다.
다인종적, 다문화적이고 초국가적인 세계평화의 전망이 보편화되고 있는 가운데 왜 인간의 이상향의 꿈은 통제불능의 폭력과 살상과 같은 파국적인 신화를 만들어내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