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자유의 신학을 위해 투쟁하면서 신학교육에 전념하던 시기 (1939-1961)
일본의 식민지 통치는 날이 갈수록 더욱 악해져서 한국민족을 근본적으로 없앨 생각이었다. ‘안악사건’, ‘105인 사건’ 과 함께 기독교인의 변절을 꾀하는 정책을 썼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신사참배의 강요였다. 평양 신학교가 신사참배 때문에 문을 닫게 되자, 교회가 있는데 교역자 양성기관인 신학교가 없을 수 없다는 판단아래 서울에서 김대현 장로를 중심으로 새로운 신학교 설립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1940년 3월 경기 도청으로부터 조선신학원(후에 한신대학교)이 설립인가 되어 승동교회 지하실에서 역사적인 개강을 하였다.
그가 제시한 신학사상의 기초 이념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교수는 학생의 사상을 억압하는 일이 없이 충분한 동정과 이해를 가지고 신학의 제학설을 소개하고 다시 그들이 자율적인 결론으로 칼빈신학의 정당성을 재확인함에 이르도록 할 것” 그는 이러한 이념에 근거하여 1961년 정년 퇴임할 때까지 한국신학대학에서 신학교육을 담당했으며, 한국교회의 신학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였다. 그는 해방 후 경동교회를 중심하고 목회도 했으며, 기독교의 건국이념등 강연을 통해 해방된 조국의 방향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일차적 관심은 신학 교육 기관을 통한 교역자 양성이었다. 그는 이 땅의 바리새주의적 교권주의와 근본주의 신학에 도전하여 살아있는 생명적 말씀의 신학을 위해 투쟁하였다. 그의 이와같은 투쟁이 오늘의 “한국 기독교 장로회” 란 교파를 형성하게 되었으며, 오늘의 한국의 정치신학을 형성하는 기틀을 마련하게 된 것이었다. 오늘 한국 신학에서 진보주의적 삶의 신학적 학맥은 그에게 그 뿌리를 갖고 있는 것이다.
2. 김재준 신학의 위치
1) 김재준의 예언자 연구
김재준은 청산학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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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재용, “한국 그리스도교 신학사” (대한기독교서회, 1998)
김재준, “축자영감설과 성서무오설에 대하여”(십자군, 19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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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수, “한국기독교회사”(한국장로교출판사, 1995)
간하배, “한국장로교신학사상”(실로암, 1988)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연세대학교출판부,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