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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국모드와 중국소설의 성립
끊임없이 새롭게 자신의 문학이론을 전개하며 철학적 성찰을 하였던 되블린은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소설쓰기를 시도했는데 “베를린”이라는 통일독일제국의 수도는 중국문화와의 만남에 있어 외래문화의 교류지라는 특수한 역할을 담당한다. 이미 1887년에 베를린에 오리엔탈언어학과(Seminar für Orientalische Sprachen)가 개설된 이래로 영국이나 불란서의 영향권에서 점차로 독일어권이 독립하여 중국문헌에 관한 소개 및 번역이 활발하여졌다. 왕룬소설이 어떻게 쓰여졌는지에 대하여 “내가 이 중국소설을 쓸 당시, 몇 번이나 베를린의 민속박물관에 가서 일련의 중국 기행문이나 풍속에 관한 글을 읽었다.” ꡒDer Epiker, sein Stoff und die Kritikꡓ(1921), in : AzL, 338.
고 밝히고 있다.
되블린이 그 당시 접할 수 있었던 중국에 관한 문헌이 처음에는 1912년 8월 18일자 편지에서 보면 Albert Ehrenstein을 통하여 중국의 종교, 철학에 관하여, 특히 종교단체 및 도교에 관한 자료를 Martin Buber에게서 조언을 얻게 된다. 그리고 1912년 10월 13일자 부버에게 보낸 편지에서 중국소설에 필요한 자료들, 구체적으로 청나라의 “금륭시대” 당시의 산문에 관한 자료를 청하게 된다.
마틴 부버는 1910년 “Reden und Gleichnisse des Tschuang-Tse”를 편저하면서 그 책의 맺는글에서 “Die Lehre des Tao`라는 제목으로 과학문명의 발전에 대한 유럽인들의 생각에 대하여 경고를 하고 있다. 왕룬소설의 원고를 부버에게 보냈을 때 부버는 즉시 이 소설의 독창적 가치에 대하여 인정하면서 되블린에서 몇 가지 줄일 것과 고칠 것에 대하여 조언을 하게 된다. 이 곳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이 왕룬소설로 인하여 연결되는 삼인이 모두 유태인이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