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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 루이 16세에 대한 재판에서 무죄를 주장한 지롱드파와 처형을 주장한 산악파간의 대립은, 양파로 하여금 타협불가능의 상태가 되게 하였다. 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를 처형함으로써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와 전쟁상태로 들어가게 되었고(제1차 대(對)프랑스동맹의 결성), 국내에서는 경제위기가 심각해졌다. 또 파리 시민의 과격파가 폭동을 일으켰고, 왕당파의 대규모적인 반혁명반란도 일어났다. 그러나 지롱드당의 자유주의 정책으로는 위급사태에 대처해 나갈 수가 없었으며, 상퀼로트(sansculottes:프랑스 혁명에서 중심적 역할을 한 파리의 하층시민)의 혁명적 행동력을 끌어들이지 않고서는 혁명을 유지해 나가는 것조차 어려운 상태에 빠졌다. 그리하여 난국타개를 위하여 혁명적 입법을 촉진하였지만, 이미 지롱드당의 무능함이 드러나 많은 공화주의자가 산악파로 이동하고, 상퀼로트도 산악파를 지지하여 지롱드파와 적대하게 되었다. 6월 2일 파리 시민이 봉기하여 지롱드파의 중진 의원들을 체포하고 국민공회로부터 지롱드파를 추방함으로써, 산악당이 국민공회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혁명의 위기 속에서 파리 시민대중의 지지를 배경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관철을 위하여 혁명사업을 추진하였다. 공화력 제1년의 헌법(1793년 6월에 채택, 그 적용은 평화 회복시까지 연기되었으나, 결국 산악당의 몰락과 함께 폐지되었다)은 민주주의의 본질적인 특징을 규정한 것이었다. 1793년 7월 17일의 법령으로 영주제(領主制)의 무상폐지를 규정한 한편, 아시냐(assignat:프랑스혁명 당시의 불환지폐)의 하락이 심각한 식량위기를 초래하였으므로 매점 금지법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