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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두고 시인 고은은 이미 있어 왔던 정선 아라리의 곡조에 고려말의 정선 칠현들이 자신들의 심사를 실려 보았던 것으로 해석한다. 즉, 정선 아라리가 고려말의 양반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름 없는 민초들의 삶 속에서 노동요로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참고로 고정옥의 『조선민요연구』이래로 정설이 되었다고 하는 아리랑 형성에 관한 견해는 다음과 같다. 즉 아리랑이 형성된 것은 본디 논노래, 들노래, 베틀노래, 뗏목노래 등 민초들의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있던 노동요가 1865년 경복궁 중수 때 팔도에서 모여든 부역꾼들이 각지의 일노래를 주고받는 가운데 아리랑의 보편성과 지역성이 동시에 확보되고 일의 노래가 사회화 현실화되며 한편으로는 놀이노래로 확대해갔다는 것이다.)
시인 고은은 시인 특유의 상상력에 의해서 그 기원을 고대에까지 뻗치고 있는 셈인데 그 정확한 시원을 확인할 길은 없지만 분명한 것은 정선 아라리가 빼어난 산수에 가로막혀 오갈데 없이 척박한 땅을 일구어 그날그날을 연명해야 하는 민초들이 노동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불렀던 노동요인 것만은 분명한 듯하다. 아우라지 나루 근처에서 나고 자라 술과 밥을 파는 가게를 했던 김산옥 여인은 정선 아라리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 20년 전만 해도 하늘만 빼꼼히 내다보이는 첩첩산중이었지요. 비행기재(삼밭재), 성마령, 반점재, 큰너근령, 작은너근령, 어델가재도 이런 크고 험한 재를 넘어야 했으니까요. 그때만 해도 평생 정선 밖을 나가보지 못한 사람이 허다했어요. 땅이라고는 산밭뿐이고, 무슨 사는 재미가 있었겠어요? 밭매면서 나무하면서 그냥 신세타령하듯 노래만 부른 거지요. 이쪽 밭에서 노래가 끝나면 조쪽 밭에서 받고……」
신경림의 문학기행『강따라 아리랑 찾아』1992.2. 문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