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Ⅱ. 퇴계철학의 근본입장
(1) 시대적 배경과 윤리적 특성
어떤 철학이나 사상이든지 그것은 그 시대와 무관할 수 없다. 퇴계철학은 더 더욱 시대적 배경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퇴계가 살았던 서기 1501년에서 1570년은 흔히 역사적으로 사화기라고 불린다. 그것은 그의 나이 4세때 갑자사화가 있었고, 19세때에는 기묘사화, 45세때에는 을사사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연산군 4년(1498년) 사초문제가 발단이 된 무오사화는 김일손 등 사림파의 희생과 유배를 가져왔다. 그 뒤 연산군은 사치와 향락에 빠져 재정의 낭비가 많았고, 재정이 곤란해지자 훈구공신들의 토지와 노비까지 몰수하려고 하였다. 이 때, 궁중과 깊은 인연을 가진 무리들이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폐출 사사사건을 들추어서 그를 충동하여 훈구 및 사림의 잔존세력을 죽이고 귀양보냈으니 이것이 이른바 갑자사화(연산군 10년, 1504년)이다.-389-
그 후 방탕과 폭정으로 일관했던 연산군이 박원종, 성희안 등의 쿠데타로 축출되고 중종이 즉위하였는데, 사림의 소장학자 조광조는 왕의 신임이 두터웠다. 조광조는 유교적인 도덕국가의 건설을 정치적 목표로 설정하고 적극 추진하였으나, 그의 세력 비대와 위훈삭제 사건을 계기로 훈구세력의 미움을 받아 조광조는 죽고 많은 사림이 제거되니 이를 기묘사화(중종14년, 1519년)라 한다. 또한 중종의 배다른 두 아들의 왕위계승을 에워싼 두 윤씨의 외척싸움에서 윤원형 등에 의해 윤임일파가 제거된 것이 이른바 을사사화(명종원년, 1545년)이다. 이기백, <한국사신론>, 일조각, 1979, 247면.
이와같은 네 차레의 사화는 근본적으로 사림사류와 훈구대신들과의 싸움이었으며, 훈구파의 승리와 사림파의 패배를 결과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