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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중엽(고려중엽)의 학자요, 묵객(묵객)이었던 이곡(이곡 : 충열왕 24년·1298년 ~ 충정왕 3년·1351) 선생은 가정집(가정집) 20권을 남겼다. 선생은 기행문(기행문)인 동유기(동유기) 가운데 신라(신라)의 화랑(화랑)들이 사용(사용) 하였던 차도구(차도구)가 동해(동해) 바닷가 여러 지방(지방)에 남아 있는 것을 목격(목격)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강릉(강릉)의 경포대(경포대)에도 신라 화랑들이 차를 끓이던 돌솥이 남아 있고, 한송정(한송정)에도 화랑들이 차를 달일 때 쓴 돌솥이 남아 있다고 기록 되어 있다. 화랑은 삼국사기(삼국사기)의 신라본기(신라본기)에 보면 진흥왕(진흥왕) 37년 (576년) 봄에 비로소 화랑도가 생긴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종래부터 있었던 공동체를 국가적으로 편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화랑은 신라때 청소년으로 조직되었던 민간 수양단체이다. 일명 국선도(국선도), 풍월도(풍월도), 원화도(원화도), 풍류도(풍류도)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화랑도를 처음 일으키게 된 목적은 몸과 마음을 단련하고 교양을 쌓아 사회생활의 규범을 가르쳐 필요한 경우에는 전투원(전투원)이 될 수도 있는 사회의 중심 인물을 양성하는 것으로 전통을 존중하고 협동정신과 신의(신의), 용감성을 배양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화랑도의 가장 중요한 수양 방식은 서로 도의를 닦는 것, 시와 음악을 즐기는 것, 명산(명산)과 대천(대천)을 찾아 다니며 즐기는 것 등이다.
화랑의 훈련지도와 자문은 주로 스님이 맡았다. 그 대표적 예로 원광법사(원광법사)의 세속오계(세속오계)는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