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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천황제파시즘에 의한 식민통치하에서의 가톨릭교육자로서의 삶
소위 천황을 신성시하는 파시즘 내지 군국주의에 의한 식민통치와 독실한 가톨릭신자로서의 삶, 얼핏 보기에도 양자는 화합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후자를 일생의 목표로 추구하던 장면은 전자의 밑에서 어떤 삶을 영위했을까?
태어나서부터 해방을 맞기까지의 장면의 생을 일별(一瞥)하면 이렇다. 그는 1899년 8월 28일 서울 적선동의 외가에서 3남 3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본가는 제물포(인천)였으며, 부친 장기빈은 그곳에서 세관관리로 근무하고 있어 집안은 경제적으로 윤택한 편이었다. 모친 황루시아의 영향으로 그의 집안은 모두 독실한 천주교도였으며, 장면이 평생 간직한 깊은 신앙심도 이에 연유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그의 직계자손 중에서만 사역자가 둘 나왔으며, 현재 주교이자 춘천교구장으로 있는 장익신부는 그의 3남이다).
장면은 8살에 박문(博文)학교에 들어가 고등과를 마치고 16살에 수원농림학교에 들어가 20살에 졸업한다. 그곳 졸업생들의 통상적 진로인 지방행정관의 자리로 가는 대신 그는 서울 YMCA 기독교청년학관 영어학과로 진학하여 3년간 영어를 배운 다음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미국 유학의 길에 오른다. YMCA에서 영어를 배우는 동안 그는 용산에 있는 천주교소신학교(天主敎小神學校)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는데, 후에 한국 가톨릭의 무게중심이 되는 고(故)노기남대주교도 이 때 그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였다.
그런데 장면이 YMCA에서 영어를 배우며 소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던 당시는 3·1운동이 있고 그 여파로 전국적으로 항일독립의 열기가 뜨거웠던 시기였다.